기대는 왜 상처가 되었을까?
나는 항상 인간관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기대’를 품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면, 그 사람도 나를 배려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사람에게는, 내가 위로가 필요할 때도 당연히 함께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내가 주었던 만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순간마다 마음은 조용히 부서졌다.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감정의 소모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관계를 오히려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작은 실망에서 시작된 질문들
직장 동료 중 한 명과는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다. 퇴근 후에 종종 술도 마시고, 사적인 고민도 나눌 정도였다. 어느 날,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일이 생겼고, 그는 그런 내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했고, 단 한 마디의 위로조차 없었다. 그날 나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내가 너무 기대했나?” 그 질문은 그 관계뿐만 아니라 내가 맺고 있던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번졌다.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만약 내가 그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면, 그의 무반응에 그렇게 상처받았을까? 어쩌면 그의 태도는 그저 ‘자기 방식’ 일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원했던 반응’을 기대했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감정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서 기대는 일방적인 감정의 압력일 수 있다. 기대는 보이지 않는 요구다.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상대에게 어떤 감정적 반응을 ‘요구’했던 것이다.
기대가 만든 오해의 덫
기대는 보통 호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호의가 반복되면, 어느새 그것은 '기준'이 되고 만다. 상대가 이전보다 조금만 덜 다정해도 실망하고, 응답이 늦어지면 서운해한다. 그런 감정은 쉽게 오해를 낳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늘 먼저 연락하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먼저 연락해오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 마음을 오해하게 됐다.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건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상대는 그저 자기의 일상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만든 기대의 틀 안에 그 사람을 억지로 가두고 있었던 건 나 자신이었다.
기대를 내려놓는 연습
기대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기대 패턴’을 인식해야 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기대하게 되는지, 어떤 관계에서 더 민감해지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작은 실험부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답장이 늦어도 스스로 감정을 달래는 연습을 했다. “답장을 늦게 보내는 것은 내게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냥 바빠서일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중립적인 해석을 주입했다. 기대를 내려놓는 것은 무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재정비하는 일이었다.
내려놓음이 만들어준 자유
기대를 버리고 나니 관계가 가벼워졌다. 예전에는 사람의 말투나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감정의 진폭도 컸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상황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행동이 내가 바란 것과 달라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 말 한마디가 주는 여유는 상상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덜 괴롭히게 되었다. 실망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실망하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게 되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
기대를 버린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진실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해 준다. 내 기준이나 감정적 필요에 따라 타인을 해석하는 대신, 그 사람이 선택한 방식과 태도를 존중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한 것이다. 기대를 내려놓은 이후, 나는 누군가의 침묵도 배려로 느끼게 되었고, 서툰 표현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대를 내려놓고도 이어지는 관계
놀라운 점은, 기대를 내려놓아도 소중한 관계는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예전에는 내가 너무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아 억울했던 관계가, 지금은 훨씬 균형 잡힌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적고, 실망이 적으니 감정적 반응도 덜해졌다. 그러자 관계의 온도는 자연스럽게 안정되었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나를 위한 기대의 재정의
기대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렵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형태의 보상을 바란다. 하지만 그 기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이제 나는 타인에게 기대하기보다, 나 자신에게 기대한다. ‘내가 지치지 않을 만큼 애쓰자’, ‘내가 즐길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하자’. 그런 기준을 세우고 나니, 타인의 반응에 덜 흔들리게 되었다. 거절도, 무반응도 더 이상 나를 부정하는 신호로 보이지 않았다. 나를 아끼는 방식으로 기대를 조율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결론: 기대 없이도 관계는 가능하다
기대 없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건, 처음엔 낯설다. 하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해방감이 있다. 관계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고, 타인은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훨씬 유연하고 따뜻해진다. 더 이상 마음속으로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 기대 없이도 관계는 이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더 단단한 내가 된다.
기대는 때로 인간관계를 왜곡시키고, 실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글은 기대를 내려놓으면서 더 단단하고 평온한 관계를 맺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으로 관계를 재정의한 경험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